​권 순 익  Kwon Sun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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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20 나의 오늘 (흰물결 갤러리)

2020 속 깊은 그림들 (정수아트센터) 

2019 (Miaja갤러리, 싱가포르)

2018 (Saphira & Ventura 갤러리, 미국)

2018 (DYC 갤러리)

2018 ‘積·硏(적·연) - 쌓고,갈다’ (영은미술관)

2017 ‘無我(무아)’ (Imaginart갤러리, 스페인)

2016 (가일미술관)

2016 (아트소향갤러리)

2016 ‘無我(무아)’ (Museo de ArteModerno, 베네수엘라)

2015 (UNC갤러리)

2015 (Museo de ArteContemporaneo del Zulia, 베네수엘라)

2015 한국-베네수엘라 수교 50주년 기념전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 외 다수

단체전

2019 아트소향 갤러리

2016 양평군립미술관

아트페어

2018 KIAF (COEX)

2018 CONTEXT New York (미국)

2018 아트부산 (BEXCO)

2017 CONTEXT Art Miami (미국)

2017 화랑미술제 (COEX)

2016 SCOPE MIAMI BEACH (미국)

소장

싱가포르, 베네수엘라, 중국, Cosmo Arte Gallery(스페인), 동양제철화학, LG화학, 해태제과, 한국일보, (주)박영사, 성남아트센터, 태평양건설, 톨리마미술관(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 줄리아 현대미술관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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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아()에서 무아(無)로 건너가는, 살점과도 같은 주체의 얼룩을 그린 - 글 : 고충환(미술평론)

연년여의(年年如意). '해마다 뜻한 바를 이루다', '해마다 뜻한 바와 같다'. 여기서 '연'과 '년'이 포개진 것은 '강조 화법'으로써 특정 연에 한정되지는 않는 '항상성'을 말한다. 항상적으로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염원'과 '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염원과 기대를 남에게 주는 기원과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선한 기운과 무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여유가 나온다. 뜻한 바와 같은 상태, 무탈한 상태, 그리고 여유로운 상태가 점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점층 화법'이고 '점강 화법'이다. 연과 년이 포개진 것은 그래서이다. 그리고 '소요(逍遙)'. 마음을 내려놓고 하릴 없이 거니는 상태를 말하며, 그 의미가 연년여의에서의 여의와 통하고 여유와 통한다.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 마음을 내어준 상태, 마음을 방기한 상태가 여의와 여유 그리고 소요를 하나로 관통한다. 이처럼 연년여의와 소요라는 말 속에는 마음 곧 자기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고 '자의식'이 들어있다.

그림 속에서 이 자의식은 흰 옷을 입은 남자로 나타난다. 작가의 자화상일 수 있겠고, 우리 모두의 익명적인 초상일 수 있겠다. 호랑이와 어우러지고 물고기와 더불어 노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화적 캐릭터일 수 있겠다. 이처럼 작가는 전작에서 민화적인 그림을 통해서 신화적인 의미를 전한다. 평면적인, 양식화된, 질박한 그림 속에 선한 기운과 무탈한 상태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신화는 유토피아이다. 현실에는 없으면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만 있는, 없으면서 있는 장소이고 탈장소이다. 거기가 어디인가. 장소로 치자면 아프리카이고 탈장소로 치자면 마음이다. 작가의 민화적인 그림은 아프리카 기행 이후 민속적인 그림과 결합한다. 여기서 아프리카는 실재하는 장소로서보다는 작가의 마음속에 내재화된 (탈)장소로 봐야하고 유토피아로 봐야한다. 여기서 다시 소요가 호출된다. 작가의 그림은 자기 마음을 그린 것이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작가의 마음속을 거닐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마음 곧 자기에 대한 인식을 그린 것이고 자의식을 그린 것이다. 특히 그림 속에 대문자 'I'와 소문자 'i'가 등장하는 그림에서 이 자의식은 좀 더 분명해진다. 각각 큰 자아(대우주)와 작은 자아(소우주)를 구별한 것인데, 하이데거의 존재 혹은 존재 자체(보편자)와 존재자(개별자)의 구별에 해당한다. 큰 자아와 작은 자아, 대우주와 소우주, 존재와 존재자, 보편자와 개별자가 그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차원을 그린 것이고, 상호작용하면서 상호간섭이 이루어지는 경지를 그린 것이다. 존재가 존재다워지는 존재다움의 지경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전작은 민화적이고 민속적이다. 신화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 그림 속에 마음 곧 자신에 대한 자의식을 그려놓고 있었고, 이는 그대로 역시 마음에 대한 자기 반성적 사유의 과정이며 결과를 그려놓고 있는 이후 작업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이후 작가의 그림에는 일대변신이 일어난다. 신상으로 치자면 개벽천지랄 만한 이 변신은 대략 2010년대 언저리(2012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면면을 보자면 외관상 구상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추상적인 표현이 들어선다. 유기적인 형태가 기하학적인 형태로 대체된다. 다채로운 색채표현을 지양하고 모노크롬이 지배적인 색채감정으로서 등장한다.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이 지양되는 것인 만큼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성이 강화된다. 그렇다면 근작에서 작가의 존재는 사라진 것인가. 작가의 근작은 다만 그림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화일 뿐인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전작에 나타난 구상적인 형태와 표현이 근작에서의 형식논리와 결합하면서 그 속으로 녹아내린, 그리고 그렇게 녹아내려 침전된 침전물이며 응축물로 봐야한다. 작가의 주체가 흔적으로 남은 앙금으로 봐야한다. 작가의 근작이 내면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각각 '무아-회(회귀)', '무아-그림자', '무아-신기루', '무아-심경(心境)'이라고 부른다. 마지막 '무아-심경' 시리즈(그림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하는 기왓장 설치작업)를 제외한 나머지가 다 그림이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없는, 그러면서도 같은 그림이 하나도 없는 일련의 그림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시리즈물이다. 이 그림들의 주제들에는 하나같이 '무아'가 들어있다. 내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근작에서 내가 없는 상태를 그린 것인가. 도대체 무아, 곧 내가 없는 상태는 가능한 상태인가. '무아'는 '아'를 극복한 상태인가. 도대체 '아'는 극복해야할 대상인가.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아의 상태로부터 무아의 상태에 이르고 내가 없는 상태에 도달한 것인가. 실상을 말하자면 도달했다기보다는 도달하기 위한 경로에 있다고 봐야하고, 그 수행과정을 그림이 매개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한다. 말하자면 이 일련의 무아 시리즈는 내가 없음을 실천한 수행의 결과인 것이며, 내가 없는 상태를 변주한 지점들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없음은 각각 회귀로, 그림자로, 신기루로, 그리고 마음거울로 변주된다.

먼저 '회귀'를 보자. 여기서 회귀는 아 곧 나에게로의 회귀인가? 무아 곧 내가 없는 상태로의 회귀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진정한 나)로의 회귀인가? 어느 정도 이 모두를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지경일 것이다. 페르소나(가면주체)를 벗고 아이덴티티(가면에 가려진 주체)를 회복하는 경지일 것이다.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되는 나를 벗고 비동일성으로 탈주되는 나를 덧입는, 자유자재로 흐르면서 시시각각 이행하는 내가 매번 새롭게 등록되고 갱신되는 차원일 것이다. 그렇게 매순간 새로이 등록되고 갱신되는 존재의 원형일 것이다. 궁극일 것이다. 본성일 것이다. 그 본성이 '마음거울(心境)'이다. 그리고 그 마음거울에 비쳐보면 나는 그림자로 그리고 신기루로써 드러난다. 나는 그림자를 추구하고 신기루를 쫓는다. 나라는 그림자를 추구하고 나라는 신기루를 쫓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림자이고 신기루이다. 나는 환상이고 환영이며 환청이고 환각이다. 수면에서 산란되는 물비늘이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결이며 칠흑 같은 밤을 떠도는 행성이다. 숨결이고 호흡이다. 무분별하게 흐르는 에너지(기)이고 흐름이다. 흔적이고 얼룩이며 자국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무아 시리즈는 바로 이처럼 아가 분기되는 무아지경을 그린 것이고, 매번 그리고 매순간 내가 이행해가는 무한 경지를 그린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내가 없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있음을 그린 것이고, 그것도 절박하게 있음을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무아는 사실은 아를 절실하게 존재 증명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림을 보면 무수한 땡땡이 점들이 화면에 가득하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자면 먼저 밑칠을 한 화면 위에 촘촘하게 모눈을 그린다. 그리고 모눈을 격자 삼아 땡땡이 점들을 그린다. 한 모눈에 한 점씩. 한 방에 하나씩. 그렇게 땡땡이 점들로 모눈이 다 채워지고 나면 고운 모래가루를 안료에 섞어 만든 재료를 나이프를 이용해 먼저 그린 점 위에 덧바르는데, 그저 바른다기보다는 층층이 쌓아올려 일정한 두께를 가진 또 다른 점을 만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화면의 표면 위로 도드라진 점의 표면을 흑연(실제로는 연필)으로 문질러 마치 석탄의 그것과도 같은 짙고 깊은 색감과 함께 번쩍거리는 금속성의 표면질감을 얻는다. 그림들마다 다 틀린 만큼 이 일련의 과정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그 대략적인 과정은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작업과정의 기본적인 틀로 봐도 되겠다. 이 기본형을 유지하면서 색감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점들이 어우러져 만든 패턴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면과 면을 포개는 방식과 포맷을 통해 변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어두운 단색계열의 화면이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 일련의 그림들이며 작업과정과 무아라는 주제의식은 무슨 상관성이 있는가. 말하자면 작가는 무아라는 주제의식을 어떤 형식과정을 통해서 얻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에서 형식과 내용은 어떻게 부합하는가. 앞서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대략적으로 살폈지만, 그 과정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고 무한 반복되는 일련의 과정을 경과하고 있다. 모눈을 그리고, 점을 찍고, 또 다른 점을 쌓고, 흑연으로 문질러 빛을 낸다. 그 과정은 일정한 룰을 따르는 것으로서 그 과정에서 주체가 지워진다. 작가는 다만 틀이 그림을 그리도록 돕는 조력자에 머물고, 룰이 그림을 그리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계기 역할에 머문다. 그리고 다시, 그 과정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그렇게 주체가 지워지고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이 그림을 그린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다.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상호 삼투되는 차원이 열린다.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지워지고 사라진 주체는 사실은 그림 속에 삼투된 것이고 그림의 일부이며 전체로 육화된 것이다. 무아는 말하자면 오롯이 그림 속에 투사된 나머지 스스로는 빈껍데기로 남은 주체에 부쳐진 이름이다. 그렇게 작가는 전작에서 그림 속에 아를 투사했듯이 근작에서 무아를 투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이 무아의 지경을 실현하려면 그리는 과정에 번민이 없어야 하고 욕망이 없어야 한다. 그저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주체의 육화된 흔적만이 오롯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렇듯 주체가 오롯해지고 투명해지는 경지를 그린 것이고, 주체가 지워지고 사라지는 차원을 그린 것이고, 아에서 무아로 넘어가는 지경을 그린 것이다. 육화된 주체의 흔적이며 자국을 그린 것이고, 무슨 살점과도 같은 주체의 얼룩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아와 무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주체가 분기되는 지점들을 그려놓고 있었다. 점 같은, 얼룩 같은, 자국 같은, 흔적 같은, 살점 같은, 섬 같은, 행성 같은, 그리고 먼지 같은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존재의 스펙트럼을 그려놓고 있었다.